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살던 시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를 보고 이상함을 느꼈을때 그것과 비교도 안될정도의 이상한 부분이 그림에 있었다.
여관처럼 보이는 건물 벽에 붙어있는 마크가 바로 그 이상함의 정체였다.
이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으로써 피터르 브뤼헐이 살던 브라반트 공국(플랑드르: 현 벨기에서부, 네덜란드 서부, 프랑스 북부등 지역들)은 스페인 펠리페 2세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인구조사를 실시했고 이를 토대로 세금을 걷었다. 세금을 걷는 목적은 명백했다. 인근 국가와 전쟁중이었기에 지배국들에서 50%에 가까운 세금을 걷어 전쟁자금을 조달했다.
펠리페 2세는 독실한 구교(카톨릭)도였다.
16세기 지구상 가장 큰 격변은 구교와 신교(개신교)의 분리일것이다. 구교와 신교간의 대립과 갈등은 유럽지역을 불태우고 피로 물들었으며 신교는 구교에 의해 이단으로 지정되고 구교에 의해 많은 신교 사람들이 목숨을 잃다. 종교 개혁의 선두주자였던 루터는 교황의 지배에 반발했었던 많은 제후(일부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들을 결속시켰고 구교에 저항했으며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제국이 분열되는것을 원치 않았던 카를 5세와 제후들간에 화의가 있었다. 이때부터 각 나라의 종교는 제후들이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루터교회에 한해서 였고 칼뱅주의는 포함되지 않았다.)
펠리페 2세는 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 결정된 내용에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출 할 정도로 구교의 맹주를 자처했다.
나는 이단의 통치자가 되어 하느님의 가호와 신앙에 손상을 입히느니 차라리 국가와 함께 목숨을 버리겠다.
- 펠리페 2세 -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그림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좌측 건물을 보면 내부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나오는 사람들, 창가에 몰려 무엇인가 적고 돈을 내는 사람들, 돼지를 도축하는 사람들, 짐을 가득 실은 마차, 저 멀리 얼어붙은 강가 위를 아슬아슬하게 이동하는 노동자들등 이는 어느 눈내리는 추운 겨울날 펠리페 2세의 통치를 받고 있는 한 지역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은 많은 개신교인들이 살고있는 지역이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있지 않던 중세 유럽사회에서 카톨릭에 대한 비판과 비평은 혹독한 결과로 돌아왔었다. 그러한 세상에서 피터르 브뤼헐은 역사적인 고증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였다. 자신이 처한 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머나먼 과거의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를 빗대어 그림에 담았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