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림을 보고 글을 봤다. 그리고 해석이라는 단계를 거쳤다. 그렇다면 우리의 해석을 타인에게 전달하는 일은 어떠할까?

예를 들어 내가 어떠한 작품이나 장면을 목격하고 이를 타인에게 전달한다고 가정해보자. 내가 본 것은 이러하다.

'소년의 숙제를 먹고 있는 팬티 입은 염소를 타고 컴퓨터를 하고 있는 한 소년'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싶을 정도로 정신 나간 이야기 같지만 나는 충실히 내가 본 것을 묘사했다. 쉽사리 나의 묘사가 이해되는가?

사람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황을 인지하는 경향이 강하다. 경험은 가장 직관적이고 가공이 필요 없는 직접적인 체험이다. 반면 상황이나 작품을 전해 듣는 것은 간접 체험이기에 다소 차이가 있다. 즉,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을 당신이 보기 전에는 상상의 영역에서 추론으로 내 이야기를 재구성한다.


그리고 간적접인 체험으로 상상하던 것을 직접 경험하게 되면 나의 상상과 다소 차이가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내가 경험한 것을 타인에게 내 경험과 가장 유사하게 전달하는 수단은 무엇이 있을까? 가장 간편한 방법은 '말'이다. 언어는 훌륭한 전달 수단이자 많은 것을 담아 표현할 수 있다. 이 언어는 문자로도 표현할 수 있고 이 또한 훌륭한 전달 수단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 언어는 당신이 생각하는것보다 더 복잡하고 많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


다음의 14분가량의 영상을 하나 보도록 하자. 러시아 인지학자인 Lera Boroditsky의 TED 강연이다. 그녀는 강의를 통해 매우 오래된 질문을 하나 던진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형성할까?" 그리고 그녀는 그녀만의 해답을 찾아간다. 유튜브 자막 기능을 이용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내용이 훌륭할 뿐 언니가 이뻐서 추천하는 게 아니다.

영상의 그녀는 짧은 강연을 "여러분이 어떤 언어를 말하는지가 여러분의 사고방식을 형성합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결국 인류가 오래전부터 가졌던 질문에 "YES"라고 답한 셈이다.

흔히 사피어-워프 가설로 알려진 언어적 상대성이라는 말이 있다. '사피어-워프 가설'이라는 명명에 여러 말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이름보다는 사피어와 워프가 이야기한 부분을 살펴보자. 학계는 이에 대해서 전적인 수용이나 전적인 거부도 하지 않는 입장이다. (어찌 보면 기본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 워프의 가설은 쉽사리 인정되고 있지 않다.)

워프는 사피어의 제자이고 사피어의 생각을 워프가 발전시켰다고 본다. 사피어는 '현실 세계는 상당한 정도로 그 집단의 언어습관의 기반 위에 형성이 된다'라고 말했다. 위 레라 브로디츠키와 비슷한 생각이다. 반면, 워프는 좀 더 대범하고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하나는 사람들의 인지 범주는 그들이 말하는 언어에 의해 결정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의 행위는 상황에 따라 그들이 사용하게 되는 언어의 언어 범주에 의해 지배받기 쉬울 것이라는 것이다.
위 세 사람의 말이 어려울 수도 있다. 쉽게 말하면 스피어와 브로디츠키는 언어가 사람의 세계관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그 세계관이 언어로 표현되는 반면, 워프는 언어가 세계관을 형성하고 세계관이 언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여러분은 한글과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는 대한민국 사람일 것이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지만 한글의 우수성은 세계 어느 문자보다 훌륭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심지어 우리가 사용하는 문자의 창제자, 창제 연도, 어떠한 원리로 만들어졌는지 모두 알 수 있다. 한글의 자모[각주:1]를 풀이해 놓은 훈민정음해례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러한 한글을 오랫동안 사용한 민족은 우리 민족이 유일하기에 우리 민족만의 세계관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은 다른 언어를 가진 다른 민족과 차이점이 있을 것이다. 즉, 민족 간에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세계관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다.

사피어-워프의 가설은 이러한 점에서 그들의 가설이 맞다고 볼 수 있겠지만, 다른 언어체계를 가진 두 민족이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기에 이러한 가설이 맞다고 볼 수는 없다.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셈족어 계통만 살펴봐도 아랍어, 암하라어, 티그리냐어, 히브리어(이스라엘 한정)등 아카드어에서 파생된 셈어파[각주:2] 언어임에도 서로 비슷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무슨 논문을 쓰는 것도 아니고 내 블로그에서 이런 복잡한 글을 쓰는 것은 블로그 운영 취지에 어긋난다. 지금까지 말했던 것 중 이러한 것들이 있구나 정도로 그냥 대충 보고 넘겨라. 14분짜리 영상까지 포함되어있기에 분량이 너무 길다.

사람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언어뿐만 아니라 사람이 태어난 지리적인 요인과 민족적 요인, 교육, 가정환경 등 너무나 많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타인 역시 여러 요건들을 통해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형성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비슷할 수 있으나 먼 관계이면 차이가 발생한다.

미국식이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통용되는 특유의 양식이나 격식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음식이라던지 태도라던지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것들을 가리켜 주로 말한다. 예를 들어 신발을 신고 침대 위에 올라간다던지 아침에 빵과 커피를 먹는다든지 우리나라 정서와 거리가 먼 것 들이다.

사용하는 언어를 비롯해 생활 양식등에서 많은 차이점을 가진 미국사람과 우리나라 사람 사이에 기본적인 세계관과 사고방식의 차이는 얼만큼 날까? 아마도 꽤 많은 차이점들을 보일것이다. 간단하게 살펴보면 미국은 기독교를 기반으로 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그들에게 밥먹을 때 기도는 낯선것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대부분 밥먹을 때 기도는 굉장히 낯선 장면일것이다.

이러한 각기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이 하나의 작품을 보고 표현할 때, 그 표현 방식도 각 민족마다 차이점이 발생할 것이다. 같은 민족의 작품을 해석한다면 그나마 작가의 의도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겠지만 타 민족이라면 자신의 민족성에 가깝게 해석할 것이다.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나만의 세계관, 나만의 사고방식이 세상을 해석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타 민족의 작품을 해석하려면 적어도 타 민족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고 그제서야 그 작품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배움이다.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우리 국민 정서에 맞춰 아몬드나무를 살구나무로, 올리브를 감람나무로, 기타르를 거문고로, 템버린을 소고로 친절한 의역도 좋지만 히브리 문화, 유대 정신을 지나치게 한국 정서로 이해하고 의역한다면 먼 훗날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로 성경을 이해 할 수도 있을것이다.

운보 김기창 화백 (1913-2001), 십자가에 못박힘

 

더보기
운보 김기창 화백 (1913-2001), 최후의 만찬
운보 김기창 화백 (1913-2001), 승천
운보 김기창 화백 (1913-2001), 아기예수의 탄생
운보 김기창 화백 (1913-2001), 죄없는자가먼저돌로처라


타 민족의 글과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민족의 정서와 문화 이해는 기본 중에 기본이다. 라는 말을 끝으로 이번 챕터인 '세상을 바라보는 눈' 편을 마친다.

  1.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7911 [본문으로]
  2. 어원적으로 따지면 다소 잘못 붙여진 명칭이다. 그러나 관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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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 나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를 통해 작가의 시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유아 살해』 작품 역시 작가의 시대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 작품은 준비해 둔 주제와 함께 추후 따로 다루기로 하겠다.

오래전 2009년 일간지에서 나는 재미있는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아래 출처를 남기니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https://news.joins.com/article/3885483)


'북어', '아마존 수족관', '대설주의보' 등을 쓴 최승호 시인의 인터뷰였다. 그의 다수의 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있으며 모의수능에서도 자주 출제된다.

2004년 최승호 시인은 수능에 출제된 자신의 시와 관련된 문제들을 모두 틀렸다며 현행 교육에 문제점을 토로했다.

(출처 : https://news.joins.com/article/3885483)


(나는 여기서 이 기사 내용의 진위여부를 밝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기사에서 발췌된 문제는 2004년 고3 10월 모의고사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진위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해당 고사 문제를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기사를 토대로 해당 상황을 정리해보면,
최승호 시인은 본인의 시와 관련된 문제가 틀렸음에도, 해당 문제를 맞힌 학생들이 존재한다. 즉, 학생들은 출제자의 의도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해 해당 문제의 정답을 맞혔다. 과연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와 『아마존 수족관』등 하나의 작품은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고, 작품을 마주하는 대중은 그 작품을 각자 해석하게 된다. 작품을 접한 대중은 때로는 작가의 의중을 읽어 낸다던지,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품을 해석한다. 이는 개인이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차이를 만든다.

위 시인의 작품을 예로 들자면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문학이라는 작품으로 표현해 냈다. 여러 문학적 기법들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위 시인의 시는 교과서에 해석과 함께 실렸다. 이 해석은 책을 편찬하는 사람의 해석이고 그러한 해석은 같은 교과서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공통으로 공유한다. 모의고사는 문제를 통해 논리적인 사고로 문제를 해결해 답을 도출해낸다.


표현이 자유로운 문학-이라는 의미는 이전의 학문과 동일시되는 의미가 아닌, 오늘날 학문과 구분된 한정적인 의미의 순수문학-을 논리적인 사고로 접근하고 정돈된 하나의 결론으로 표현해내는 방식이 과연 적절할까?


문학은 문자로 표현된 예술 작품이다. 그림은 모양과 빛으로 표현된 예술 작품이다. 이 두 예술은 공개되는 순간 작품을 마주한 이에게 해석할 즐거움이 주어진다. 작가가 작품을 공개할 때, 작품의 해석을 해준다면 2차적인 해석은 무효해지지만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누군가가 알아봐 주는 즐거움 역시 잘 알고 있기에 해석을 대부분 생략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봤다면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기에 앞서 그토록 고리타분하게 들어왔던 '작가의 의도'를 왜 파악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방법으로 문학을 해석하는 방법은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문학을 논리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 오히려 하나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최적화된 해석 방식이다. 다만, 이는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회적인 합의하에 정형화된 작품 해석에 한해서이다. 대부분 이러한 작품은 작가가 알려지지 않았거나, 이미 작가가 잠든 후라 작가의 의견을 들을 수 없다.

문학이라는 예술은 정답이 없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을 하나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창작자를 지우려 하는 시도이다.

이 지면을 통해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것은, 창작자가 그 어떠한 이야기가 없다면 당신은 어떠한 예술이든 마음껏 즐기고 해석해라. 누군가 옆에서 당신의 해석이 틀렸다고 한다면 시원하게 무시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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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가가 살던 시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를 보고 이상함을 느꼈을때 그것과 비교도 안될정도의 이상한 부분이 그림에 있었다.

 

여관처럼 보이는 건물 벽에 붙어있는 마크가 바로 그 이상함의 정체였다.

이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장으로써 피터르 브뤼헐이 살던 브라반트 공국(플랑드르: 현 벨기에서부, 네덜란드 서부, 프랑스 북부등 지역들)은 스페인 펠리페 2세의 통치하에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인구조사를 실시했고 이를 토대로 세금을 걷었다. 세금을 걷는 목적은 명백했다. 인근 국가와 전쟁중이었기에 지배국들에서 50%에 가까운 세금을 걷어 전쟁자금을 조달했다.

 

펠리페 2세는 독실한 구교(카톨릭)도였다.

16세기 지구상 가장 큰 격변은 구교와 신교(개신교)의 분리일것이다. 구교와 신교간의 대립과 갈등은 유럽지역을 불태우고 피로 물들었으며 신교는 구교에 의해 이단으로 지정되고 구교에 의해 많은 신교 사람들이 목숨을 잃다. 종교 개혁의 선두주자였던 루터는 교황의 지배에 반발했었던 많은 제후(일부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들을 결속시켰고 구교에 저항했으며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제국이 분열되는것을 원치 않았던 카를 5세와 제후들간에 화의가 있었다. 이때부터 각 나라의 종교는 제후들이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루터교회에 한해서 였고 칼뱅주의는 포함되지 않았다.)

펠리페 2세는 이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 결정된 내용에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출 할 정도로 구교의 맹주를 자처했다.

 

나는 이단의 통치자가 되어 하느님의 가호와 신앙에 손상을 입히느니 차라리 국가와 함께 목숨을 버리겠다.
- 펠리페 2세 -

 

다시 그림으로 돌아와 그림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좌측 건물을 보면 내부로 들어가는 사람들과 나오는 사람들, 창가에 몰려 무엇인가 적고 돈을 내는 사람들, 돼지를 도축하는 사람들, 짐을 가득 실은 마차, 저 멀리 얼어붙은 강가 위를 아슬아슬하게 이동하는 노동자들등 이는 어느 눈내리는 추운 겨울날 펠리페 2세의 통치를 받고 있는 한 지역을 보여주고 있다. 이 지역은 많은 개신교인들이 살고있는 지역이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있지 않던 중세 유럽사회에서 카톨릭에 대한 비판과 비평은 혹독한 결과로 돌아왔었다. 그러한 세상에서 피터르 브뤼헐은 역사적인 고증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였다. 자신이 처한 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머나먼 과거의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를 빗대어 그림에 담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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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하나의 그림이 있다.
16세기에 그려진 작품으로 처음으로 이 작품을 본다면 딱히 작품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쉽사리 발견하기 어렵다.

이 작품은 16세기 브라반트 공국(오늘날로 치면 네덜란드 등의 지역)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의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이다.

예수님의 탄생 과정을 복음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누가복음에 따르면 로마의 속국인 이스라엘에 대한 인구조사가 있었다. 갈릴리 지역에 있었던 요셉은 인구등록을 위해 출산이 임박한 그의 약혼녀인 마리아를 데리고 그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숙소를 찾지 못한 채로 출산을 했어야 했다.

작품 중앙 하단을 보면 푸른 망토를 걸치고 나귀를 타고 있는 여인과 밀짚모자를 쓰고 톱을 어깨에 걸친 사내가 있다. 마리아와 요셉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하나 더 보자.

 

 

이 작품은 피터르 브뤼헐의 『영아살해』이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헤롯왕 때, 동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난 아이를 찾았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예루살렘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에 헤롯왕은 유대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왕이 어디서 나올지를 물었고 그들은 베들레헴이라 답변했다. 헤롯은 뒤 이어 박사들을 불러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아이를 찾게 되면 바로 자신에게 알려달라고 했다.

고국에서 별을 보고 쫓았던 그들의 발걸음은 결국 베들레헴 어느 한 집 앞에 머물렀고 이를 기뻐한 박사들은 결국 아기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이후 박사들은 꿈에서 고국으로 돌아가라는 지시를 받고 바로 고국으로 돌아간다.

박사들이 고국으로 돌아간 사실을 알게된 헤롯은 분노하여 사람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 별이 나타난 때를 기점으로 2년 안에 태어난 모든 사내아이들을 죽인다. 요셉은 헤롯이 보낸 사람들이 베들레헴에 도착하기 전, 꿈속에서 아이를 데리고 급히 이집트로 가 다시 꿈속에서 지시가 있을 때까지 거기서 머물라는 지시를 받고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이집트로 무사히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려지고 제목이 달린 이 작품들을 처음 접한 나에게는 매우 의아하면서 형편없는 작품이었다.

(독자분들은 제가 어떠한 부분에서 의아해 했고 형편없다고 느꼈었는지 알겠나요?)

 

가장 먼저 그림에서 건물양식과 사람들의 의복을 보자.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영아살해는 분명 예수님이 태어난 시점인 AD 1세기경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그러나 작품에 등장하는 건물양식과 사람들의 의복은 중세 유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여기서 발견한 오류를 작가가 고증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고증 없이 자신이 태어난 시대에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관을 대입해 -오래된 과거를 자신의 시대에 맞춰- 과거를 구현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는 작가가 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한 오류는 이 작품을 보고 평가하는 내가 저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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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내 이야기를 어떻게 정리할 것이며 어떻게 전달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평소에 누군가와 특정한 주제를 가지고 대화가 약속되어있을 때, 그 주제에 관련해 어느 정도 준비를 하고 나간다면 대화의 부담이나 심적부담은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준비를 했기에 대화가 크게 끊기는 현상도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나는 준비를 안 한다.(당당)

이러한 준비는: 를 특정한 틀 안에 가두고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준비한 것 외에 변수가 발생하게 된다면 -예를 들어 상대가 내가 준비하지 않은 질문을 한다던지 이러한 것들- 나름 당황하거나 그 변수를 즉시 외면하고 피하려 할 것이다. 즉, 대화의 자연스러움이 사라진다.

그래서 나는 항상 준비 없는 변수로 이루어진 대화를 하게 된다. (이것도 특정 영역에서는 기본적인 틀이 있기에 감당 가능한 수준에 있기에 가능하다.) 이로써 대화에는 날것으로써의 내가 참여하게 되고 자연스러워진다.

하지만 이제는 준비를 해야 한다.

 

위 상황은 나와 상대가 직접 대면해 대화할 때나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부터 준비하는 것은 양방향 소통보다는 일방적인 이야기의 전달이기에

 

상대가 나의 생각을 A. 쉽고 직관적으로 접근하고 B. 검색 가능하며 C. 피드백이 가능해야 한다.

 

위 3가지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몇 가지 고민을 했다.

  1. 처음부터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이야기로 시작하고 이야기로 끝을 낸다.
  2. 상대의 학습 수준을 가늠할 수 없기에 되도록이면 누구나 이해 가능한 어휘와 단어들을 사용하고 보편적인 개념들로 접근한다.
  3. 이야기에서 내적 추론의 영역을 벗어나 외적 자료가 필요할 때, 별도의 카테고리에 넣어두고 필요에 따라 첨부로 제공한다.
  4. 댓글을 통한 질문에 정성스레 답변한다.

 

이를 위해 본 블로그의 카테고리를 정리했다.

  • 끄적끄적 : 개인 글들이 올라가며, 블로그의 성격을 반영하며, 블로그 이용자를 도와준다.
  • 이야기전에 : 별도의 카테고리로 외적 자료를 정리하고, 그밖에 도움이 될만한 글들을 모아둔다.
  • 성경 이야기 : 본 블로그의 핵심으로 성경을 이야기화 한다. 이미 성경 기록 형태 자체가 이야기이나 좀 더 현대적인 개인역으로 소설이나 동화 같은 느낌으로 표현하며 권, 장, 절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글의 흐름을 보여준다. 무리한 재편집이나 의역과 오역은 최대한 자제할 것이며 필요에 따라 일부 각색들이 첨가될 경우 표시를 해 혼란을 주지 않는다.
  • 톺아보기 : 성경 이야기가 완료되면 다시 한번 이야기를 면밀하게 연구하는 과정.

 

이로써 내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준비 과정이 끝났다. 이제는 천천히 위 내용들을 메워나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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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과정들을 되풀이 하는것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다. 정해진 메뉴얼대로 흘러가는 일이라면 그나마 한가지만 준비하면 되지만, 나의 반복은 항상 내가 아닌 상대가 바뀌기에 메뉴얼을 가질 수 없는 과정을 되풀이 한다. 이러한 과정들을 반복적으로 겪다보니 하나의 패턴을 발견했다.

 

상대에 맞추어 하나씩 내 생각들을 열거했던 과정들은 내 생각들을 하나로 보여준다기 보다 오히려 내 생각을 토막내서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기에 상대는 내 생각을 -하나의 잘 정돈된-이야기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단편적인 개념들로 받아들였다. 그렇다보니 나의 수고와 달리 많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즉, 나는 아직도 부족한 사람임을 증명해주고 있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다시한다는 생각으로 나의 생각들을 정돈하고 정리하고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블로그를 꺼내어 들었다. 내 생각이 잘 정리되어 있지 못하고 내 생각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오히려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괴로울 것이다.

 

상대가 괴롭지 않고 즐겁게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오늘부터 조금씩 내가 가진 이야기들을 정리 해보려 한다.

물론 귀찮음이 항상 블로그를 방치하게 만들었지만, 이번에도 귀찮음으로 방치한다면 나는 계속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과정들을 되풀이 하고 있을것이다.

 

그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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