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나는 『베들레헴의 인구조사』를 통해 작가의 시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유아 살해』 작품 역시 작가의 시대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이 작품은 준비해 둔 주제와 함께 추후 따로 다루기로 하겠다.
오래전 2009년 일간지에서 나는 재미있는 기사 하나를 발견했다. (아래 출처를 남기니 꼭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북어', '아마존 수족관', '대설주의보' 등을 쓴 최승호 시인의 인터뷰였다. 그의 다수의 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있으며 모의수능에서도 자주 출제된다.
2004년 최승호 시인은 수능에 출제된 자신의 시와 관련된 문제들을 모두 틀렸다며 현행 교육에 문제점을 토로했다.
(나는 여기서 이 기사 내용의 진위여부를 밝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기사에서 발췌된 문제는 2004년 고3 10월 모의고사에서 확인할 수 있으니 진위를 파악하고자 한다면 해당 고사 문제를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기사를 토대로 해당 상황을 정리해보면,
최승호 시인은 본인의 시와 관련된 문제가 틀렸음에도, 해당 문제를 맞힌 학생들이 존재한다. 즉, 학생들은 출제자의 의도와 문제를 제대로 이해해 해당 문제의 정답을 맞혔다. 과연 이러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와 『아마존 수족관』등 하나의 작품은 작가의 의도가 담겨 있고, 작품을 마주하는 대중은 그 작품을 각자 해석하게 된다. 작품을 접한 대중은 때로는 작가의 의중을 읽어 낸다던지, 아니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품을 해석한다. 이는 개인이 작품을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차이를 만든다.
위 시인의 작품을 예로 들자면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문학이라는 작품으로 표현해 냈다. 여러 문학적 기법들로 자신의 생각을 글로 남겼다. 위 시인의 시는 교과서에 해석과 함께 실렸다. 이 해석은 책을 편찬하는 사람의 해석이고 그러한 해석은 같은 교과서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공통으로 공유한다. 모의고사는 문제를 통해 논리적인 사고로 문제를 해결해 답을 도출해낸다. |
표현이 자유로운 문학-이라는 의미는 이전의 학문과 동일시되는 의미가 아닌, 오늘날 학문과 구분된 한정적인 의미의 순수문학-을 논리적인 사고로 접근하고 정돈된 하나의 결론으로 표현해내는 방식이 과연 적절할까?
문학은 문자로 표현된 예술 작품이다. 그림은 모양과 빛으로 표현된 예술 작품이다. 이 두 예술은 공개되는 순간 작품을 마주한 이에게 해석할 즐거움이 주어진다. 작가가 작품을 공개할 때, 작품의 해석을 해준다면 2차적인 해석은 무효해지지만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누군가가 알아봐 주는 즐거움 역시 잘 알고 있기에 해석을 대부분 생략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봤다면 우리는 작품을 감상하고 해석하기에 앞서 그토록 고리타분하게 들어왔던 '작가의 의도'를 왜 파악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논리적인 방법으로 문학을 해석하는 방법은 잘못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문학을 논리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 오히려 하나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최적화된 해석 방식이다. 다만, 이는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사회적인 합의하에 정형화된 작품 해석에 한해서이다. 대부분 이러한 작품은 작가가 알려지지 않았거나, 이미 작가가 잠든 후라 작가의 의견을 들을 수 없다.
문학이라는 예술은 정답이 없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술을 하나로 정의하려는 시도는 창작자를 지우려 하는 시도이다.
이 지면을 통해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것은, 창작자가 그 어떠한 이야기가 없다면 당신은 어떠한 예술이든 마음껏 즐기고 해석해라. 누군가 옆에서 당신의 해석이 틀렸다고 한다면 시원하게 무시해라.